최근 들어 사춘기 소년처럼 감수성이 상당히 예민(?)해진것 같다. 얼마전엔 신세한탄하는 선배랑 술을 먹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간신히 울음을 참은 적도 있다. 드라마나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도 가끔씩 혼자 감상에 젖어들어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물론 나의 이런 (싸구려?)감성을 자랑하고 싶은 의도는 없지만, 최근 이런 나의 반응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불감증에 시달렸기때문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좋다고 추천하는 작품을 보더라도 전혀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보고 있는 도중에 마음속으로는 ‘이부분이 재밌는 부분인가, 여기서 웃어야 하나?’라는 식으로 고민할 정도였으니. .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와 영화를 보러간다는 건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영화보고 나서 떠들 말이 있어야지.
“재밌었어?”
“음. 뭘 먹을까?”
막연하게 정신과 치료를 고려해본 적도 있었는데,, 이처럼 무감각해져버린 건 아무래도 군대에서 얻어온 병같다. (근거없는 억측인지라소송까지는 제기할 생각이 없으니, 국방부는 안심하셈. 어떤 현상의 원인을, 이처럼 단순화시켜서 결론내리는 건 위험하다고 친구에게충고를 들었기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억측’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굳이 말을 만들어내자면, ‘가질 수 없는 사람의 체념’ 같은 거라고나 할까. 괴로웠다. 뭔가를 보고난 이후 느끼게 되는 감동의 여운이 나를 한없이 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군대안에서 뭔가에 대해 설레이거나, 빠져드는 것은 정말로 치명적이다. 어차피 그것을 갈구하더라도 손에 넣을 수 없는 환경인데다가,그 감정을 마음껏 향유할만한 여유도 없다. 러브스토리를 보고 진한 감동에 젖으면 뭘하나. 그럴수록 똥휴지를 치우는 화장실 청소는더 비참해진다. 석학들의 문장과 사상에 감탄하면 뭐하나. 어차피 고참의 욕설을 피하는 게 최우선 과제인데.
일석점호를마치고 내무실의 조명이 꺼진 다음, 천정을 바라다보며 감동의 여운을 가슴 속에서 되새김질을 할수록 쓴 물이 배어나온다. 이불을덮고 생각을 지우려고 해보지만,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휴가날짜를 세보며 또 뒤척거린다.
마음놓고 그런 작품들을 찾아서 감상할 수 없는 나의 처지가 괴롭고, 감상 이후에 오는 여운이 또 한번 나의 처지를 일깨우며 괴롭게 만들었다. 병장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군대에 있을 때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많았다. 월드컵, 대선, 탄핵, 이라크 파병, 김선일 사망까지. 기쁨과 분노가강렬하게 표출되는 사건이었지만, 그럴수록 괴로웠다. 그야말로 다른 별나라의 일들일 뿐. 관심을 가질수록, 뭔가를 마음속에서표출하고 싶을수록 깨닫는 거다. 난 알록달록 전투복을 입은 군바리란 걸.
그러니 어떡해. 그냥 될 수 있는 한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게 괴로움을 최소화하는 길이었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머리를 텅 비우는 게 가장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이었고, 그러다보니 내 감정, 감각 기관이 거세되어 버렸다.
감정이입 금지. 호기심 금지. 기쁨 금지. 따라서 자연스레 좌절도 금지되는거지 뭐.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무래도 제대하고 나서 1년반 정도 시간이 흘러서다. 2년여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1년반이면 싸게 먹힌 건가.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다스베이더경의 숨소리’ ㅋㅋ...)
다시는 불꺼진 내무실에서 천정을 바라다보며 뒤척거리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