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라이어 -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김영사 |
나는 그다지 자기계발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그 책이 필살(?)의 성공 비법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나에겐 그것을 이행할 노력이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뭘해라-, 뭘해라- 라고 읽으면서 납득은 되지만, 책장을 덮으면 나는 나태한 인간으로 되돌아오고 역시 난 병신임을 깨닫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빼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역자 노정태가 번역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뭔가가 있겠다는 기대감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는 있었다.
저자는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빌 게이츠, 비틀즈 등등)의 성공 비결을 따지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빌게이츠나 비틀즈 등등이 ‘천재’이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성공 신화를 수긍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성공한 인간들은 정말 우연히 기회를 잘 잡았을 뿐이고, 여기에 약간의 재능이 더해져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책에서의 첫 번째 실례는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 글래드웰은 유소년 팀, 그리고 그 하위 리그 유소년 팀, 또 그보다 더 하위 리그 유소년 팀 등의 선수 신상명세를 분석해본다. 놀랍게도, 각 리그에서 수위급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들은 1~3월 출생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사실 별게 아니다. 캐나다에서는 각 연령별로 유소년 선수 리그를 만들어놓는데, 그 연령을 나누는 기준이 각 해의 1월 1일~12월 31일이란 거다. 1980년 1월 1일 생과 1980년 12월 31일 생은 같은 리그에서 뛰는데, 더 일찍 태어난 놈이 발육 상태도 좋고 훈련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12월 31일에 태어난 애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는 거다. 그리고 유소년 시절에서의 이 차이는 나이를 먹어가며 누적되고, 결국 성인 선수가 되어서도 그 차이가 생긴다는 것.
빌 게이츠도 사실 그 시절에는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프로그래밍 컴퓨터를 당시 학부모들이 구입해놓았고, 이를 통해 컴퓨터 산업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각 개인의 천부적 재능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이 자신이 처한 환경의 도움을 받아 얼마나 더 좋은, 더 많은 교육의 기회에 노출될 수 있느냐는 얘기다. (물론 글래드웰이 개개인의 후천적인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스하키 선수나 빌게이츠나 성공의 고지라고 일컬어지는 10000시간의 숙달과 단련의 시기를 거쳤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묵묵히 1만 시간의 시기를 거친 것도 대단하지만,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확장되며, 각 개인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 심지어는 아시아인이 수학을 잘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에 대해 논한다. (아시아인이 수학을 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글래드웰은 크게 두가지를 꼽는다. 중국,일본,한국 등에서는 수를 지칭하는 언어가 단순 명료하고 논리적이라는 것. 1은 일이고 10은 십이고 7은 칠이며, 17은 십칠이며 71은 칠십일이다. 반면 영어에선 1은 one, 10은 ten, 7은 seven이며, 17은 seven-teen이다. 71은 seventy-one이다. 역자의 말마따나, 그런데도 교육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영어를 쓰자는 얘기는 이 얼마나 또 코미디인가. 또 하나는 죽자살자 일하는 벼농사 문화가 1만 시간 이상을 공부에 투자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요인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글래드웰의 이러한 분석에 대해 이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사례들을 꿰어 맞추는 억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가설이나 질문까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결론은 교육의 기회가 얼마나 보장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성공한 천재들에 대해 논할 때, 그가 얼마나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의지로 극복해내며 달콤한 성공을 이뤄냈는 지에 대해 찬양한다. 그런데 그런 건 없다. 얼핏보기엔 그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극복한 것 같으나, 그들은 행운의 조력자, 혹은 훌륭한 시스템으로부터 구제를 받았고 또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기회를 포착해 1만 시간의 노력을 기울이느냐의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개인의 능력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의 중반에서도 나오지만, 저자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부유층이 빈곤층에 비해 얼마나 많은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언급한다. 기실 버락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열에 대해 찬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교육을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부모들의 광적인 교육열은 그나마 그 불평등한 요소들을 상쇄시키는 필요악이다. 오바마가 교육개혁을 부르짖는 데에는 빈곤층에게도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줘야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도 오바마의 칭찬한마디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쑥스러워하는 MB를 보면 말할 수 없는 코미디다. 심지어 오바마의 교육 개혁에 자극받아 공교육의 근간을 흔드는 행태들은 코미디를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자식의 교육 때문에 고위공직자의 위장 전입이 용인 되는 사회, 입시 자율화 및 영어 공용화 등이 교육계의 화두로 등장하는 사회는 분명 평등한 교육 기회가 보장되는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볼 순 없다. 오바마나 글래드웰이 한국의 교육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이 있다면, 그나마 미국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교육의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이다. 부디 그 지점을 오해하지 말고, 마치 고려대 총장처럼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교육의 질에 비해 싸다’는 둥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으라’는 둥의 무식한 소리는 안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혼자 잘난 아웃라이어(천재)는 없다. 사회의, 그리고 교육 시스템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아웃라이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