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글2005. 11. 18. 05:47
원래부터 "군대에서 배울 것도 많다"라는 시덥잖은 말은 믿지도 않았다. 차라리 전두환 머리통에 머리털 나길 기대하는 게 낫지... 그런고로 불만만 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순리.

사실 군대에서 크게 고생한 것도 없다. 머리한번 박아본적도 없고, 정색을하며 "미친새끼야"라는 소릴 들어본적도 없다. 심지어나보고 "개념없는 새끼"라고 뒤에서 욕하던 한 고참은, 마침 그 얘길할때 내가 지나가면서 듣게 되었는데, 나에게 미안하다고사과까지 했으니.
책도 일병 꺾이면서 볼 수 있었고, 귓구녕에 이어폰도 낄 수 있었지. 생각하면 참 편한 군생활이었다. (쫄아서 공군가느라 4개월 복무 더 한 걸 빼면)

그렇더라도, 참 많은 걸 뺐겼다. 아무리 군기없는 부대였다지만, 그래도 이병은 이병. 원래 성격이 남 눈치를 잘 보는 성격이긴하나, 군대에서만큼 비굴할 정도로 남 눈치를 보면서 산 적은 없다. 어쩌면 오히려 그런 성격이었기에 더욱 눈치를 보게된 건지도모르겠다.

뭔가 '내 행동이 조낸 욕먹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항상 마음 깊은 곳에 깔려버렸고, 이런 생각은 휴가를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슈퍼에서 담배를 살 때 조차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게다가 슈퍼 점원이 내 말을 한번에못알아들을 땐 너무너무 당황스러워 오히려 목소리가 더 작아지는 그런 엿같은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식의 걱정은 아직도 내 의식 속에 깔려있어, 사실 지금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요즘 말도 헛나오고,말이 헛나오면서 더듬기까지. 게다가 목소리는 (작은 건 아닌데) 내가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톤으로 들린다. 일상대화의 톤이아닌, 뭔가 꾸미면서 말하는 톤.

이렇게 '말'을 살짝 잃어버리게 되자, 역시 예전의 재치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대학 2학년때는 과내 최고 재치꾼이라는 칭송반 조롱반을 듣기도 했었는데, 이제 그런건 다 물건너간 셈.

(이런 연유로, '재치'를 뺏어간 군대를 다시 한번 저주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군대 꿈을 꾼다. 제대가 30일정도 남은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꿈이다.)

헌데 요즘은 단순히 그런 피해의식을 심어준 것 때문에 내가 사람들과 대화하기 어려워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2년반의공백기간이 '컨텐츠의 공백'을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나름대로 '프렌즈'의 챈들러를 벤치마킹하면서 유머감각을 연마했는데,그런 컨텐츠 섭취 기간이 뻥 뚫려서 그런 건지. 아무튼 그렇게 자주 접하질 않다보니, 요즘은 노력해도 힘들다. 뭔가 씨리즈물을꾸준히 못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버릇, 대화 능력 상실, 이해력 부족까지. 제대 이후 내 삶에서 정말로 재밌다고 느껴본 순간이 거의 없다.

이제는 사람들과 대화할때 아예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도 이해가 잘 안된다. 그저 머리속이 깜깜해지면서, '아니 그러니깐저 사람이 방금 말한 내용의 주제가 뭐지?'라면서 중딩 국어 수업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다. 한번에 쫘악 뛰어넘는 이해력이상실되었다.

그래서 군대를 갔다오면, "빨리 취직 준비나 해야지"라고 마음을 다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근데 차라리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마음은 황폐한데, 그렇다고 현실 순응에 발빠르지도 않다.

말하자면 완전 찌질이. 가슴 속에 뭘 품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확실하게 현실에 적응할만한 민첩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올해가 가는게 두렵다.

대한민국, 군대,,,, 낄낄...
Posted by TTAsoon
끄적끄적/글2005. 11. 14. 03:54
20대 중후반에 접어들어서, 내 인생의 '모델'을 정하고 살아간다는 게 사실 좀 우습긴하다. 그 사람이 꼭 위인따위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서른살 다 처먹도록 뭐하고 산거냐?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0대에라야, 그런 삶의 모델이 있다는게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이던가. (20대 초반까지도 정말 멋진거다.)

요근래 정말 삶에 자신이 없어졌다. 딱히 뚜렷한 재주는 없고, (그만한 노력도 안했고) 그렇지만 그냥 여자저차 월급받아 생활하는봉급쟁이 인생은 싫고. (그야말로 허영심이 가득찬 것이지... 쩝쩝... 봉급쟁이라도 누가 시켜준대? 낄낄)

뭔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하고 싶긴한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낼 만한 능력과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긴 싫고. 미친거지. 한마디로. 대학 1학년생도 아니고.

적어도 대학 1학년때 친구넘들끼리 밴드를 결성해야 했다. 매일 말로만, 말로만, 우리가 뭐 하나하면 조낸 끝내줄텐데... 라고했지만,,, 끝내주기는 커녕 차근차근하게 하나 시작도 못했다. 그런 것도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뭐하나 필이꽂혀서 지랄을 못해본 셈이다.

그러던 차에, 어영부영 군대를 다녀오고, 취업준비나 열심히해야겠다라는 정상적인(?)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을때, 누나의 도움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해봤다. 나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정말 좋은 경험이 되리라생각했는데, 사실 좋은 경험이긴 했으나 가능성의 한계만 보고 돌아온 것 같아 씁슬했다.

아무튼, 아무튼, 써야할 얘기는 이게 아닌데,
지난주 수요일 저녁. 나름대로 정신적 자극을 받은 술자리를 가졌다. 모 연출가와 모 작가, 그리고 우리 회사 동료들과 가진 술자리는 가히 신선한 자극이었다.

모연출가...의 라이프 스타일은 상당히 구닥다리다. 술값도 자기가 내야하고, 주위 사람들을 강력하게 휘어잡는 스타일, 그러면서도인간적인 면모를 슬쩍슬쩍 내보이는. 그렇지만 눈에서 나오는 자기 주관(세련되진 않았지만)과 같은 고집과 자부심이 꽤인상적이었다.

모작가...의 필력은 감탄을 하던 터였으나, 외모에서 풍기는 매력은 더욱 압도적이었다. 지금까지살아오면서 첫인상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 사람은 딱 두번째다. 결혼도 했고,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녀였는데, 베르테르의마음이 그러하였을까? 라면 좀 오버고.

아무튼 좋아하던 작가라고 인식하고 바라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가 지닌마력은,,, 그야말로 손에 넣을 수 없을 듯하면서도 반드시 가져야할 것 같은 그런 것이였다... 그래서 진탕 술먹고 추파도던졌는데, 다시 한번 후회가 되기 시작하는구나.

내 인생의 모델을 얘기하다가 이야기가 새버렸지만, 아무튼 그둘을 만나고 나서, 약간은 내 인생의 모델을 찾은 것 같긴하다. 사실 중고딩시절 박무직이나 유시진의 만화를 보고 나서, 작가에게느꼈던 동경... 비슷한 감정이긴 하나. 실제로 그들과 나란히 서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단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나도 뭔가가슴속에 움직이는 게 있는데, 뭔가 멋지게 해낼 것 같은.

아무튼 그런 사람들의 눈빛은 너무나 맑다. 고딩시절 애들 뺨때리면 쿨피스란 교사나 군대시절 애들 괴롭이던 김상사의 눈빛과 비할까.

나도 나란히 서고 싶다. 배우고 싶고, 나도 만들어내고 싶다. 비록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그나마 단기간에 지나갈 수 있는 루트는 있으니. 도전하고프다.
Posted by TTAsoon
감상/드라마2005. 11. 8. 13:21
김준우 집안에서 준우-영지 커플을 갈라놓기 위한 방해공작이 진행되면서, 안스럽게 영지을 바라만 보던 아버지 주현이 결국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종영된 <비밀남녀>. 지난 18회에서 주현은 소주병 두병을 비밀무기 마냥 주머니에 감춰두고 적진(준우네 집)에 홀로 진격했다. 평소 술과 함께 세상을 관조하며 깨달은 서달구식 철학 세계와 철학교수인 준우 아버지(이정길)의 철학 세계가 맞붙는 대결전이 펼쳐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현은 "인생이란 마음대로 잘 안되지만 받은 걸 잘보면 나쁘지만은 않다"라며 인상적인 대사를 뿌리며 분위기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손바닥에 적어온 "애지욕기생"이란 문구도 인용해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이라며 준우와 영지의 사랑을 막아선 안된다고 설파했다. 여기서 주현은 다소 코믹하면서도, 아버지의 애정을 진지하게 표현해내면서 인상깊은 장면을 연출했다. '일간 스포츠'에서도 이 대목에서 주현의 대사가 네티즌들 사이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논어> 애지욕기생 :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


큰의미는 없지만, 가볍게 딴지를 걸고 싶은 부분이 있다. 바로 손바닥에 꼬질꼬질 적어온 "애지욕기생". 드라마에서 설명된 대로 논어의 한 구절로서, "사랑은 사람을 살리게 하는 것"이라 해석되어 사랑에 대한 명문구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바 있다. (실제로 이 문구를 블로그에 옮겨놓은 블로거들도 많고, '좋은생각'과 같은 서적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서강대의 장영희 교수도 자신의 저서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이를 인용한 바 있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이제껏 본 사랑에 관한 말 중 압권은 < 논어(12권 10장) >에 나오는 "애지욕기생 愛之欲其生",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하지만 사랑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말이다.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헌데 논어 안연편에 실린 이 문구를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이런 감미로운 해석이 완전 틀렸다고 할 순 없지만) 다소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고전의 해석에 있어서 딱 떨어지는 해석이 있겠냐만은, 적어도 앞에서 해석된 바와 같이 로맨틱한 의미는 아니다.

논어 안연편 10장에 실린 구절을 보자면,

子張問 崇德辨惑
자장이 덕을 높이고 미혹을 분멸하는 것에 대하여 묻자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공자 말씀하시기를, "충과 신을 주로 하여 의에 옮기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고 하셨다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그가 죽기를 바라니

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 -(후략)
이미 그것이 살기를 바랬다가 역시 그것이 죽기를 원하는 이것이 미혹함이니라

물론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사랑하면 살고자 하고, 싫으면 죽고자 하니" 식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뒷 구절의 의미가 다소 달라지기도 한다. 게다가 의미상으로 따져보자면 '사랑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란 장영희 교수의 해석도 완전 엉터리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문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문장은 아니다. 특히 뒤에 "惡之欲其死(오지욕기사)"가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시혹야(是惑也)"라고 덧붙인 점을 본다면 이 문구가 왜 들어갔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공자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혹은 개인의 감정에 치우치는) 일반적인 사람의 본성을 미혹함을 지적하고자 했었고, "사랑이란 ~ 하는 것"과 같은 달콤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를 심각한 왜곡이라 매도하고픈 생각은 없다. 막말로 과거 역사에 대한 왜곡도 아닌지라 크게 상처입을 이도 없고, 세상이 혼란에 빠질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징영희 교수의 말대로 "사랑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라는 문구는 (오역을 무시해도 될만큼) 사람을 미혹하게 만드는 로맨틱한 힘이 있으니 말이다.

 

Posted by TTA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