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도서2010. 2. 23. 19:39
아웃라이어 - 8점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김영사

나는 그다지 자기계발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그 책이 필살(?)의 성공 비법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나에겐 그것을 이행할 노력이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뭘해라-, 뭘해라- 라고 읽으면서 납득은 되지만, 책장을 덮으면 나는 나태한 인간으로 되돌아오고 역시 난 병신임을 깨닫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빼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역자 노정태가 번역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뭔가가 있겠다는 기대감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는 있었다.

저자는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빌 게이츠, 비틀즈 등등)의 성공 비결을 따지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빌게이츠나 비틀즈 등등이 ‘천재’이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성공 신화를 수긍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성공한 인간들은 정말 우연히 기회를 잘 잡았을 뿐이고, 여기에 약간의 재능이 더해져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책에서의 첫 번째 실례는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 글래드웰은 유소년 팀, 그리고 그 하위 리그 유소년 팀, 또 그보다 더 하위 리그 유소년 팀 등의 선수 신상명세를 분석해본다. 놀랍게도, 각 리그에서 수위급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들은 1~3월 출생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사실 별게 아니다. 캐나다에서는 각 연령별로 유소년 선수 리그를 만들어놓는데, 그 연령을 나누는 기준이 각 해의 1월 1일~12월 31일이란 거다. 1980년 1월 1일 생과 1980년 12월 31일 생은 같은 리그에서 뛰는데, 더 일찍 태어난 놈이 발육 상태도 좋고 훈련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12월 31일에 태어난 애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는 거다. 그리고 유소년 시절에서의 이 차이는 나이를 먹어가며 누적되고, 결국 성인 선수가 되어서도 그 차이가 생긴다는 것.

빌 게이츠도 사실 그 시절에는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프로그래밍 컴퓨터를 당시 학부모들이 구입해놓았고, 이를 통해 컴퓨터 산업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각 개인의 천부적 재능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이 자신이 처한 환경의 도움을 받아 얼마나 더 좋은, 더 많은 교육의 기회에 노출될 수 있느냐는 얘기다. (물론 글래드웰이 개개인의 후천적인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스하키 선수나 빌게이츠나 성공의 고지라고 일컬어지는 10000시간의 숙달과 단련의 시기를 거쳤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묵묵히 1만 시간의 시기를 거친 것도 대단하지만,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확장되며, 각 개인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 심지어는 아시아인이 수학을 잘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에 대해 논한다. (아시아인이 수학을 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글래드웰은 크게 두가지를 꼽는다. 중국,일본,한국 등에서는 수를 지칭하는 언어가 단순 명료하고 논리적이라는 것. 1은 일이고 10은 십이고 7은 칠이며, 17은 십칠이며 71은 칠십일이다. 반면 영어에선 1은 one, 10은 ten, 7은 seven이며, 17은 seven-teen이다. 71은 seventy-one이다. 역자의 말마따나, 그런데도 교육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영어를 쓰자는 얘기는 이 얼마나 또 코미디인가. 또 하나는 죽자살자 일하는 벼농사 문화가 1만 시간 이상을 공부에 투자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요인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글래드웰의 이러한 분석에 대해 이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사례들을 꿰어 맞추는 억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가설이나 질문까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결론은 교육의 기회가 얼마나 보장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성공한 천재들에 대해 논할 때, 그가 얼마나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의지로 극복해내며 달콤한 성공을 이뤄냈는 지에 대해 찬양한다. 그런데 그런 건 없다. 얼핏보기엔 그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극복한 것 같으나, 그들은 행운의 조력자, 혹은 훌륭한 시스템으로부터 구제를 받았고 또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기회를 포착해 1만 시간의 노력을 기울이느냐의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개인의 능력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의 중반에서도 나오지만, 저자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부유층이 빈곤층에 비해 얼마나 많은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언급한다. 기실 버락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열에 대해 찬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교육을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부모들의 광적인 교육열은 그나마 그 불평등한 요소들을 상쇄시키는 필요악이다. 오바마가 교육개혁을 부르짖는 데에는 빈곤층에게도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줘야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도 오바마의 칭찬한마디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쑥스러워하는 MB를 보면 말할 수 없는 코미디다. 심지어 오바마의 교육 개혁에 자극받아 공교육의 근간을 흔드는 행태들은 코미디를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자식의 교육 때문에 고위공직자의 위장 전입이 용인 되는 사회, 입시 자율화 및 영어 공용화 등이 교육계의 화두로 등장하는 사회는 분명 평등한 교육 기회가 보장되는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볼 순 없다. 오바마나 글래드웰이 한국의 교육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이 있다면, 그나마 미국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교육의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이다. 부디 그 지점을 오해하지 말고, 마치 고려대 총장처럼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교육의 질에 비해 싸다’는 둥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으라’는 둥의 무식한 소리는 안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혼자 잘난 아웃라이어(천재)는 없다. 사회의, 그리고 교육 시스템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아웃라이어가 될 수 있다.

Posted by TTAsoon
끄적끄적/글2010. 2. 9. 10:03
이제는 그야말로 처절한 피의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다. 엄기영 사장의 사퇴. 이는 곧 방문진, MB의 명을 받은 방문진이 선임하는 사장께서 MBC를 지배하리란 얘기다. 재작년, 작년에 걸친 2번의 MBC파업은, 그래도 엄기영 사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노조라고 할 순 없어도 적어도 노조의 활동을 묵인해주는 사원 출신의 사장은 노조 파업을 지지하진 못해도 묵인해주긴 했다. 그러나, 이제 방문진의 뜻을 이어받은 사장은 파업에 관해 경찰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크다. 바야흐로 피튀기는 파업이 될 전망이다.

사퇴의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기타 언론에서는 엄사장의 정치권 행보를 예측하며 사퇴의 의미를 퇴색시키려고 한다. 그 전망이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엄사장이 그 행보를 염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MBC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상징적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엄사장의 정치권 진출 등의 의미는 나중에 논해도 늦지 않다.

MBC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언론 조직이었다. 그 태생이 정권의 개입이 있었다고는 하나, 오랜 민주 언론 투쟁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전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 언론으로서 그 존재를 확립해낼 수 있었다. KBS는 기본적으로 수신료를 받음으로써 경영되는 언론기관이었다. 사장 선임 또한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KBS가 MB집권 이후 급속도로 우선회한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SBS는 말할 것도 없는 상업 방송. 기업의 오너에 따라 운영될 수 밖에 없는 조직이다.

하지만 MBC는 기형적이라면 기형적일 수도 있는 독특한 시스템에 따라 운영된다. 우선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한 방문진 이사 9명 선임이 되고, 방문진 이사들이 MBC의 대주주의 역할을 맡는다. 사장 선임 등의 문제에 있어서 방문진 이사들이 개입하기는 하나, 이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론 MBC 구성원들의 (절차적 합의는 아닐지라도) 합의를 존중해주는 측면이 있다. 이는 과거 MBC 노조가 낙하산 인사에 따른 오랜 투쟁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적어도 이런 합의는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제는 언론사 사장을 선임하는 데 있어서 권력을 개입하지 않는다" MBC의 시스템은 어떤 한 사람, 혹은 어떤 한 권력기관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 점을 확실히 해놓은 셈이다. KBS 처럼 정권의 눈치를 크게 볼 필요도 없고, sbs처럼 사주의 뜻을 맹종할 필요도 없다. 9명이라는 다수 시스템 하에서 그 누군가가 '장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란 것이다.

허나 MB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원칙은 날아갔다. 9명 중 절반 이상은 친 MB정권의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장악'을 원칙으로 MBC를 흔들어대고 있다. PD수첩, 뉴스데스크 등 입맛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들에 대한 보복 인사를 통해 장악해 들어갔다. 방문진의 일방적 이사 선임도 마찬가지다.

엄기영 사장이 사퇴한 지금, 방문진은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 뻔하다. 과거 미디어악법 상정 때에서 볼 수 있듯이, 기실 MB정부에 대한 반발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이런 저런 비판은 많이 들어먹되,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강행될 것이 뻔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MBC 노조의 파업은 방문진 및 사장의 의지에 따라 무참히 짓밟힐 것이다.

그간 MBC가 마냥 잘한 건 아니다. 아마추어같은 실수도 많았고, 편향적인 보도라고 볼 만한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MBC가 장악된다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독자적인 언론 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사라진다는 점이다.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그나마' 보지 않고 떠들어댈 수 있는 언론 기관이 사라진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의 퇴행이다.

Posted by TTAsoon
카테고리 없음2010. 2. 4. 04:26

* 블로그 이사 기념으로, 예전에 썼던 포스팅.

벌써 5개월전에 방송된 내용이지만,
소위 대중문화전문기자라는 직함으로 널리 알려진 모 기자분께서 잘못된 기사를 쓰셨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포스팅. 최소한의 사실 확인 전화만 했어도 이런 실수는 없었을 텐데.

문제는 선덕여왕 7회. 아역 덕만(남지현)이 성인 덕만(이요원)으로 바뀌는 씬에 대해서, 모 기자님은 "8회말 용화향도 훈련중 남지현에서 이요원으로 바뀌는 얼굴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으로 매끄럽게 진행됐다"라고 썼으나, 이는 100% 잘못된 내용. 사실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은 전혀, 전혀 없었다.


<바로 요 장면>


많은 분들이 눈치채셨겠지만, 이 장면은 스태디캠을 활용한 것이다. 남지현이 물에 머리를 넣는 연기를 하는 동안, 스태디캠이 말 엉댕이를 지나면서 화면이 가리는 순간을 이용해, 뒤에 서 있던 이요원이 뛰어들어와 남지현과 같은 포즈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 장면을 실제로 보면, 아역 덕만이가 스태디캠이 어디까지 갔는지 살짝 고개를 들어 확인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참조 그림>
스태디캠으로 카메라 이동. 카메라가 5번 위치에 있을때 이요원이 남지현의 자리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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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눈썰미 예리한 분들은 그 이전 커트인 Full shot(카메라1번 위치)에서 뒤쪽에서 수련하고 있는 낭도가 이요원과 체형이 똑같다고 지적해주셨는데, 이는 맞다.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낭도가 바로 이요원이다.

이 유는 이렇다. 위 그림을 보면 이해가 쉬울 텐데, 성인으로 바뀌는 장면을 리허설해보니 스태디캠으로 찍어야되는 커트에서 남지현 뒤쪽에 이요원이 스탠바이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는 게다. 그래서 낭도로 위장(?)하여 은근슬쩍 뒤쪽에 스탠바이하기로 결정.


참고로, 순서상 Full shot을 먼저 찍고, 그 이후에 스태디캠 샷을 찍기로 했기에, 두 샷의 배경을 동일하게 맞추다보니 Full shot에도 이요원이 낭도로 서 있기로 했다. 그러나 리허설과 달리, 스태디캠 shot에서는 낭도 이요원이 배경에 걸리지 않았다. (실제 스태디캠 카메라의 동선은 3번 위치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이요원의 스탠바이를 위해 뒤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

노란색 동그라미 - 이요원씨가 맞습니다.

컴퓨터그래픽은 전혀 없었다. 색보정을 한 정도의 작업은 있었을지라도, 전-혀, 전혀 컴퓨터 그래픽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진실.

P.S) 이 장면을 위해 스태디캠 촬영을 하신 분이 고 김병권 스태디캠 촬영감독. 정말 안타깝게도, 몇달전 세상을 떠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TTAsoon